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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색에 물드는 페인트브러쉬 캐년(Paintbrush Canyon Trail)의 산객들

산촌의 아침은 자욱한 안개를 비집고 찾아듭니다. 부산한 움직임으로 여장을 챙겨 서부시대의 흔적이 가득한 잭슨홀 시티를 나서 오늘의 대장정을 시작할 스트링 호수를 향합니다. 연못이며 호수에서 발원한 물안개가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들판에는 국립 버팔로 보호구역이 만들어져 있고 그 넓디넓은 초원에는 야생동물들이 무리지어 한가로이 이른 산보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여명을 헤치고 도심을 빠져나오니 멀리 티톤의 장엄한 원초적 자태가 서서히 눈 안에 들어오고 잔설이 희끗한 설봉들이 길게 도열한 채 우리들을 반기는 듯했습니다.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번거롭지만 모두 차에서 내려 저리도 아름다운 태산을 배경으로 한 컷의 기억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동녘에서 이제야 눈비비며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더욱 신비하게 그 모습을 감춘 채 감질나게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산들이 보듬고 있는 이 지역 가장 아름다운 호수 제니호와 레이호를 연결하는 길게 끈처럼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의 스트링 호수에 이르러 10여 시간으로 예정된 산행을 준비하며 전의를 다졌습니다.

페인트브러쉬 캐년 트레일, 1200미터의 등고선을 오르게 될 험난한 길. 오늘의 그 고난의 행군뒤에는 어떤 포상이 내려질까 마음을 설레이며 호숫가에 만들어진 산책로를 따라 산행은 시작이 됩니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는 내 영혼마저 들여다보이도록 티 없이 고운데 내 심장 내 육신의 모든 것을 꺼내서 세척하고픈 욕심마저 듭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한껏 머물고 싶지만 길을 나서면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마음에 담고 떠나는 것이라고 여기며 삶이란 취하고 싶은 많은 것들을 때로는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계곡을 따라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는 이 산행로는 이미 가을이 깊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침엽수 아래 키 작은 활엽수들은 가을 엽록소를 머금고 붉고도 노랗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비끼며 서리와 이슬을 말리고 이들이 뿜어내는 신기루 같은 미세한 물기에 아침이 젖어 산속은 태초의 신비로움이 가득 서려있었습니다.

한발 한발 내 딛는 산길 숲길에는 이름 모를 들풀들로 가득합니다. 후덕한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며 우리를 반겨주니 보잘것없어 보이던 들풀마저도 친근하게 다가와 마음을 주고받는 듯합니다. 피었다 이내 져버리는 한갓 들풀, 들꽃이어도 이 유구한 준령의 역사를 지켜온 산 증인으로서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리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습니다.

계곡의 청정옥수를 벗삼아 오르고 오르니 시원한 물줄기 내리는 소리가 저기서 들려옵니다. 이름없는 작은 폭포가 시원스레 낙하하고 주변의 단풍들이 더욱 윤기를 띠며 타고 있었습니다. 고단한 몸에게 휴식의 순간을 부여하고 시장기 도는 배를 간식으로 채웁니다. 한모금 들이키는 곡차가 약이되고 밥이되고 청량제가 되는 순간입니다.

홍과 황의 색, 가을색에 도취되어 함께 젖어가는 한나절입니다. 달콤한 휴식을 마감하고 머나먼 길을 다시 오르려 합니다. 이제 시작인데 개인적으로 지난 여름에 삐끗한 허리가 디스크로 발전되어 하체 근육이 통증으로 힘겨운데 설상가상으로 정신없이 챙기던 여행보따리에 잘못 선택된 등산화가 따라와 이미 발 뒤가 벗겨져 여간 고통스런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겨우 산행의 전반이고 목표는 아직도 몽상처럼 아득하게 저기 저편에 있는데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자 나선 마음 들뜬 동료 일행의 전도를 낙심하게 할 수는 없는 터, 이를 물고 통증을 감내하며 다시 산을 오릅니다.

 

티톤산의 후미를 돌아서 정상을 오르게 되는 오늘의 이 산행로는 곳곳에 알알이 박힌 가을의 결실들을 음미하며 걷는 길입니다. 9백만년 전 거대한 지각변동으로 융기된 산맥은 애초에는 3만 피트의 높이었다는데 오랜 세월동안의 침식과 풍화작용에 의해 단단한 화강암만 남게 되어 1만 2천 피트가 넘는 거봉들이 17기나 펼쳐져 있는 오늘 날의 높이와 모습으로 변하게 된것이라 합니다.

그런 장엄한 고봉들 사이에 펼쳐진 협곡을 따라 오르는 길은 농익은 가을빛이 만연하여 그 속을 걷는 우리들에게도 이내 색이 번져 손길에도 발길에도 몸짓에도 온통 가을색의 흩어져 펼쳐집니다. 산중턱을 오르니 뽀얗게 서리가 내려 바위위에도 꽃잎에도 잎새에도 나뭇잎에도 눈처럼 아름답게 설화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시간도 멈춘 듯 고요한 침묵이 산중에 머뭅니다. 멀리 시냇물 흐르는 정겨운 소리만 주기적으로 들려올 뿐, 풍경화의 한 폭처럼 아늑하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자갈 산을 오르고 다시 점점 좁게 이어지는 가파른 경사로를 힘겹게 오르다 보니 뒤돌아보는 산 아래 광활한 평야들이 더 넓게 펼쳐집니다.

옐로우스톤 공원에 옐로우스톤 호수가 있다면 티톤엔 제이크 호수가 있어 산을 더욱 산답게 만들어 줍니다. 산이 지닐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진 티톤에는 정상 가까이에 빙하가 녹으며 만들어진 조그만 호수도 차분히 누워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리 성스럽게 여겨졌는지 이름도 Holly Lake이라 지어져 있습니다.

호수 어귀에는 장정 몇이서 손을 맞잡고 돌아서야 할 정도의 거대한 고사목이 나둥그러져 누웠는데 장구한 세월을 눈보라 비바람에 젖고 세월의 이끼를 머금은 채 처연하게 호수의 수호신처럼 여겨졌습니다.

뭉퉁한 산정이 바로 가까이에 와있고 호수에 비치는 그 모습은 작은 피라미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바닥이 훤히 보이는 옥수는 거울이 따로 필요 없는 듯하였습니다. 목표에 이르렀다는 해방감과 그랜드 티톤 산행로 중 가장 까다롭도록 힘든 코스 등정에 성공했다는 성취감 등이 복잡 미묘하게 얽히면서 문득 엄습하는 시장기에 하체가 후들거립니다. 비록 이른 아침 거칠게 싼 김밥이었어도 왕의 수라에 뒤지지 않는 맛을 품평하며 한입씩 베어 물고 까마득하게 펼쳐진 산 아래의 절경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을 합니다.

작은 섬을 품은 호수의 맑고 깨끗한 옥수와 유유히 흐르는 스네이크 강물의 정감, 이름도 알 수없는 들꽃들과 드넓은 목초밭에서 평화로이 풀들을 뜯고 있는 야생 동물들의 풍경은 잔디밭에 눕다시피 기대어 여유롭게 이를 내려다보는 우리들의 마음까지도 흐뭇하고 평화롭게 하여주고 있었습니다.

한가을 중천에 비낀 다사로운 햇살이 아늑하게 내리고 미풍은 넘실넘실 계곡을 넘나듭니다. 더 이상 등산의 힘겨움과 걱정이 없어진 지금 세상의 모든 것을 차지한 넉넉한 마음입니다. 이 순간 한없이 이어지는 자족의 기쁨은 은혜처럼 축복처럼 가을날의 그윽한 햇살처럼 그랜드 티톤의 산하에 한가득 넘쳐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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