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산이 되고 산이 내가 되는 만년 설산 Baker 마운틴.
이른 아침 요란한 새소리와 힘차게 흐르는 여울물 소리에 깨어납니다. 열어두었던 창으로 가을보다 더 짙은 내음이 들어오고 계절을 건너 뛴 산촌의 아침은 참으로 고즈넉합니다. 해발 1천 미터의 지역에도 꽃은 피워내 연보라로 치장한 들꽃들이 함초롬히 가는 길을 메우고 있어 아름다움을 더합니다. 오늘은 베이커 산의 북측 사면을 만나러 가는 스카이라인 디바이드 트레일, 예년의 기억으로는 빙하 위를 걷게 되는지라 모두 아이젠을 준비하라 명합니다.
산행 이외에는 별 할 일도 없는 일정이라 한 시간을 더 푹 자게 두었더니 몸들이 가벼워져 입도 함께 가벼운지 차안이 수다스러움으로 가득합니다, 어제의 산행에 대한 무용담부터 난생 처음 대한 빙하의 아름다움에 빠져버린 연애담까지 다양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니 가는 길 오히려 너무 짧은 것 같습니다.
이처럼 대자연 앞에서는 모두 천진난만해지고 또 수다스럽게 되어버리는 묘한 현상을 보입니다. 과묵하기 이를 데 없던 현직 교수님도 오늘 만큼은 장황한 경험담을 쏟아냅니다. 오늘 직접 밟게 될 설산에 대한 기대감까지 보태어 지니 들뜬 모습들이 역력합니다. 안그래도 군데군데 움푹 파여 보수하지 않은 황토 길에 차는 쉬지 않고 덜컹대는데 일행의 분위기는 더욱 들썩거리게 만들고 자욱하게 먼지를 일으키며 신나게 산길을 오릅니다.
Skyline Divide Ridge Trail. 명칭만 봐도 길의 형태를 예감할 수 있듯이 하늘 길 따라 릿지를 타며 가는 길. 벌써 가슴이 요동칩니다. 왕복 13마일의 길. 3마일 정도의 길을 700미터 정도 고도를 올려 나머지 4마일 정도의 길을 산정으로 이어진 릿지를 타고 가볍게 오르락 내리락하며 가서 마지막 정상을 한 이백미터 쳐올려서야 베이커와 손을 맞잡고 상봉의 기쁨을 나누고 돌아오는 여정. 순백의 베이커의 품에 안겨 마음껏 뒹굴며 재롱을 피우리라 다짐하면서 이번 여정의 마지막 트레킹을 자각하고 함께 홧팅을 크게 외치고 초입으로 접어듭니다.
아름드리나무들이 피고 지고 죽고 사는 자연의 순환에 순응하여 산그늘 가득하게 나둥그러져 있습니다. 그 위에는 상황버섯들이 피어나 세월을 함께 하고 있는데 취하고 싶은 사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을 자연 그대로 보존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 죄스럽지 않도록 욕심을 버리고 사진으로만 소유합니다.
돈으로 치자면 눈이 뒤집어지겠지만 함께 나누고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 산사람이 지켜야 할 수칙중의 하나. 마음을 비우니 산은 그에 대한 포상으로 가려진 거목 사이로 구름에 가려진 베이커 산정의 설산풍경을 보여줍니다. 오늘은 자욱하게 안개구름에 가려진 모습이 더욱 신비롭게 보이며 장대하게 이어지는 릿지의 길 위에서 얼마나 행복할지 그저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주체할 수 없는 땀을 연신 훔쳐내며 오르는 끝도 없을 것 같은 수림지역도 점점 나무들이 적어지며 또 작아지며 이어 너른 목초지를 내놓습니다, 이제 막 피워낸 들꽃들의 향기에 취해 고통조차도 잊고 언덕을 오르는데 눈앞에서 서서히 솟아오르는 설봉들.. 글레이셔 포인트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마지막 정점에 닿으니 베이커의 웅대한 자태가 눈에 가득 차버립니다. 어마어마한 산세에 주눅이 들 정도로 위압감을 주며 버티고 있는 베이커. 이제 구름은 걷히고 푸르디푸른 산을 배경으로 옥색 빙하를 이고서 섰는 베이커.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그 자리에 발이 얼어붙은 듯 정지한 채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이 순간 모두들 무슨 생각이 떠오르고 어떤 사념에 빠져 있을까? 토탈 주행거리 5000 킬로미터를 찍으며 명산을 찾아 돌고 돌아 온 길. 그저 다음 산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반길까 기대 반 의심 반으로 다가 갔으나 어느 산 어느 정상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던 그 산과 한 무언의 약속.
비록 빙하가 서서히 사라지는 북 미주의 설산이 마냥 안타까워서 근심으로 지샌 밤이 숱하지만 인솔자로서 마냥 부풀어 있는 방문자들에게 차마 꿈을 허물 수 없어 하얀 거짓말로 허풍을 쳤었는데 그래도 산은 우리를 충분히 감동시키고도 남을 풍치로 반겨줘 왔습니다. 오늘 마지막 여정인 이 장대한 베이커의 산세는 피날레를 장식하는 우리의 축제를 예지한 양 더욱 선명한 빛으로 우리 앞에 서있는 것입니다.
체면도 체면이거니와 난생 빙하 산을 대하는 대부분의 이번 방문자들이 기뻐하며 서로 손을 잡고 어께동무를 하고 하이 화이브도 주고받으며 열심히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며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고마운 마음으로 진정 존경의 예를 올리며 베이커 산군을 다시 한 번 올려다봅니다.
아직은 갈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저 앞에 보이는 전망대는 불쑥 솟아오른 산정에 있으니 가파른 길 한번 신나게 쳐 올려고 내려와야 하며 그리고 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능선을 쫒아 마지막 빙하와 가장 가까운 곳에까지 접근해야 하는 이 길.
눈에 또렷하게 보이니 더욱 가까운 듯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습니다. 정말이지 수년 만에 다시 찾은 이 길 끝에는 이미 빙하도 설산도 존재하지 않아 직접 내 발로 밟아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베이커의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의 숨소리를 들을 수만 있어도 행복한 길.
더욱 잰 걸음으로 다가갑니다. 어쩌다 무심하게 서있는 나무 몇 그루 외에는 텅 빈 산. 좌우로 펼쳐지는 거대한 산군을 감상하며 걷는 길은 시간마저 정지시켜 놓은 듯 힘든 줄도 모르고 걷고 오르게 합니다. 멀리서 볼 때는 빙하인지 폭포인지 분간이 되지 않던 장대한 하얀 물체가 빙하가 녹아서 돌산을 힘차게 차고 내리는 시냇물이었음을 확인하면서 이른 마지막 정상.
더 이상 우리의 발로서는 접근이 불가능한 정점. 더욱 더 가까워져 베이커의 심장 박동소리도 들릴 듯한 지척에 서서 다시 한 번 가슴을 열고 산을 향해 내 마음을 전합니다. 산의 기가 내 호흡기를 통해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강렬한 느낌. 내가 산이 되고 산이 내가 되는 순간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다정하게 내리는 가을 같은 햇살에 온 몸을 내맡기고 자연의 향취를 맡아봅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느낌과 기분.
오감을 열어 한껏 즐기는 산정입니다. 돌아보니 우리가 걸어온 길 뚜렷이 그려져 있고 저 길에서 함께 나눈 고난과 땀과 우정이 떠올리며 손을 맞잡고 부둥켜안은 채 정을 나눕니다. 베이커 외에는 모든 산들이 우리들 발아래 있는 착시현상이 더욱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아련한 듯 아주 가까이서 들려오는 굉음. 빙하가 무너지는 소리들. 두발로 올라 산정에 오른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명장면이자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입니다.
살아 있는 화산을 볼 수 있는 미 북서부의 자연들. 만년설을 이고 있는 절경의 명산들. 케스케이드 산, 레이니어 산, 올림픽 산과 마운트 세인트 ..